본문 바로가기

여행/해외여행

잉카문명은 건축 토목 기술이 아주 우수하여 대규모 석조 건물과 도로망을 가지고 있다.

 

 

잉카왕국은 1세기 동안 남북으로는 콜롬비아로부터 칠에의 마울레강까지, 그리고 동서로는 태평양 연안으로 부터 안데스의 동부 계곡 지대까지 방대한 지역을 종복하여 제국을 건설하였다. 잉카 제국의 역사는 제1댕 왕 망코 카팍에서 13대의 아타우알파에 이르는 시기를 1대에서 2대까지를 전설기, 3대에서 8대 까지를 군주기, 9대에서 13대까지를 역사기로 구분하고 있다. 잉카 왕국의 국명은 모든 방향 또는 4방향의 세계라는 의미의 타우안틴수요 였다. 잉카 제국은 쿠스코를 수도로 정하고 안데스 산맥의 지세에 따라 4개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잉카 제국의 주민들은 쿠스코가 지구의 중심지이고 성지라 태양에 의해 빛나는 도시라고 믿었다. 타우안틴수요의 주된 주민은 쿠스코 중심의 케추아, 코야오 지역에 정착한 라 코야, 페루의 연안 지대에 정착한 라 융가족 들로 구성되고, 그 밖에도 창카족, 푸기나족 ,우앙카족, 우아누코 족, 콘추코족, 카하마르카 족, 차차포야 족 등 수많은 부족들이 자체의 언어를 갖고 잉카 제국 내에 자리잡고 있었다.

 

 

고대 잉카 제국 최대의 정복자는 9대 왕인 파차쿠티 잉카 유팡키였다. 그는 창카 족의 공격에 직면하여 그의 아버지가 쿠스코로 이동했을 때, 군대를 지휘하여 그들을 격파함으로써 남부 중앙 고원의 방대한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1471년에 그의 아들 토파 잉카가 계승하고 1493년에는 사파 잉카가 계승하였다. 그 후 1520년 우아이나 카팍이 계승했으며 1524년 쿠스코 부인의 아들 아타우알파와 키토 부인의 아들 우아스카르 사이의 갈등으로 내란이 발생하였다.

 

 

잉카는 케추아족의 족장으로 군주가 된 후, 최후에는 강력한 제국의 왕으로 변신하였다. 초기에 잉카는 태양의 아들, 대지의 지도자, 그리고 세계의 질서 수립자로 인식되었다. 잉카 사회에는 혈족 귀족과 특권 귀족이 있었다. 혈족 귀족은 현직 잉카 왕의 부인과 자녀들을 제외한 모든 친척과 죽은 잉카 왕의 후손들로 구성되었다. 오레호네스라고 호칭되었고, 쿠스코에 거주하면서 화화스런 복장을 착용하고 공물 제공의 의무를 면제받았다. 정복한 부족의 왕과 귀족 및 그의 후예뜰로 구성된 정복 특권 귀족과 전공과 봉사에 대한 왕의 은전으로 이루어진 포상 특권 귀족이 있었다.

 

 

잉카 제국은 각 지역 지배 계층의 자녀들을 쿠스코에서 집단적으로 교육시켰다. 잉카의 교육은 경직되어 있었으마 효율적이었다. 그들의 도덕률 개념은 나태한 자가 되지 말것, 도둑질하는 자가 되지 말것, 그리고 거짓말하는 자가 되지 말것 등이 었다. 잉카 제국은 정복지의 모든 주민들에게 케추아 어를 교육시켜 방대한 지역에서 언어의 통일을 이룩하였다. 마티마에스라는 집단을 새로운 정복 영토에 보내 잉카 주민으로서의 언어와 농경술 등을 교육시켜 생산 증대와 제국의 통일에 기여하게 하였다. 야나코사스 집단은 직능 전문가이다.

 

잉카 제국의 주민들은확실히 수학 지식에서 뛰어났다. 그들의 위대함은 방대한 제국 영토를 연결한 도로망 구축의 완벽성, 산악 지대 경사지의 경작지에 수분 공급을 위한 관개 수로의 구축, 그리고 왕궁과 요새의 건설에서 시멘트의 사용없이 축조된 건축술이었다. 그들은 돌의 조각과 벽화, 금속 장신구, 비쿠냐. 알파카 및 야마의 털로 직조하고 그리고 소식을 전하기 위해 매듭을 지어 여러 색깔로 꼰 결승 문자를 사용하였다.

 

 

 

<어떤 금전적 지원도 받지않았으며 단순 정보제공을 위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