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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여행

프랑스의 몽클라르 장군과 지평리 지구전투 전적비

 

경기도 양평 지평리에 기념관과 기념비가 마련되어 있다. 1951년 2월 지평리전투에서 치러진 대 중공군 방어전투의 공적을 기념하고 전사한 장병의 영령을 추모하고자 1957년 7월 15일 국군 제5사단이 건립하였다. 미군과 프랑스군이 지평리지구에서 병력과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중공군 5만여 명의 파상적인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전투를 말한다. 2006년 6월에는 육탄용사 호국정신선양회가 지평리지구 전투전적비 공원에 지평리 전투 유엔군 참전충혼비를 건립하였다.

 

 

몽클라르 장군은 회상하면서 우리 젊은 세대는 넓은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고 집안 싸움에 세월을 낭비하는 기성세대의 구습에서 탈피하기를 빌어본다. UN정신과 더불어 세계 무대로 진출해 주기를 바란다. 애국심은 국민의 인간다운 삶과 행복을 위하는 희생정신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공산군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프랑스는 UN안보리 상임이사국이었으나 2차 대전 이후 국내 사정으로 전투 병력을 보낼 여유가 없었다. 이러한 실정을 알게 된 몽클라르는 전국을 누비고 다니면서 자신과 같이 한국전쟁에 참전할 지원병을 모집하였다.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그를 존경하던 600명이 동참하여 대대 병력이 마련되었다. 몽클라르는 중장인 장군으로 대대를 지휘한다는 것은 관례상 허용되지 않아 몽클라르 장군은 중령 계급장을 기꺼이 자청하였으며 만삭인 아내를 설득하여 무릎을 끓고 군인으로서 마지막 사명과 명예를 위해 허락해 달라고 참전을 하도록 하기를 설득하였다. 아내는 아버지 없는 아이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남편을 한반도 전쟁터로 보냈으며 이때 장군의 나이는 58세였다.

 

 

프랑스 대대는 미 보병사단 23연대에 합류해 양평 지평리를 방어하는 책임을 맡게되었다. 요충지인 이 곳을 돌파하려는 중공군 3개 사단 병력은 지평리 산악지대를 포위하고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1951년 2월 13일부터 2월 15일에 걸친 3일간의 치열한 혈전이었다. 전사 52명, 실종 42명의 희생자가 생겼으나 중공군은 전사자 약 5,000명을 남기고 퇴각하였다. 1개 연대가 3개 사단의 협공을 방어한 전투로 유엔군은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휴전후 몽클라르 장군은 10년 후에 앵발리드 기념시설의 관리사령관으로 여생을 마쳤다. 앵발리드 기념관은 나폴레옹의 묘소이기도 해 국가적 영관을 상징하는 명소이다. 몽클라르는 1964년 6월 3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앵발리드 안에 있는 성당 지하에 안장되었다. 당시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직접 장례식을 집행했다. 대통령은 눈물을 흘리면서 고인의 숭고한 군인정신과 자유를 위한 생애를 국가적 예우를 갖추어 추모했다.

 

프랑스군 참전기념비는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31-2번지에 있는 현충시설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프랑스군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한국전쟁 때 산화한 프랑스군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건립한 기념비이다. 1974년 10월 3일 국방부가 건립하였고 2000년 11월 6일부터 2001년 11월 3일까지 한국과 프랑스문화를 접목한 추모공간으로 새롭개 조성하였다. "정의와 승리를 추구하며 불가능이 없다는 신념을 가진 나폴레옹의 후예들! 세계의 평화와 한국의 자유를 위해 몸 바친 288명의 고귀한 이름 위에 영세무궁토록 영광 있으라"

 

 

<어떤 금전적 지원도 받지않았으며 단순 정보제공을 위한 글입니다>